한국 현대춤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김 태 원(춤평론·『공연과 리뷰』 편집인)
Ⅰ.
1993년 6월과 7월에 걸쳐 3주간 미국 남동부의 듀크대학에서 있었던 ADF(American Dance Festival) 주최의 국제비평가회의(1993 International Dance Critics Conference)에 다녀온 후, 나는 국내 월간 『춤』지의 한 기고문에서, 특히 현대무용을 중심으로 세계춤은 그 미학(美學)이 양극화되고 있으며, 그 양극 사이에서 우리와 같은 아시아 국가춤이 보존해왔고, 발전시켜 왔던 예술춤의 모습이 명확한 입지(立地)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썼다. 동시에 더 나아가 이전 나름대로 상당한 역사와 레퍼토리를 축적하고 있는 한국의 예술춤은 이제 아시아적 춤의 명확한 미학이나 어떤 모드(mode)를 보여줘야 하며, 그것을 창조적 측면에서나 미학적 측면에서 적극 고무·발전시켜야 한다고 여러 번 언급했다.
앞서 그렇게 양극화되고 있는 춤의 경향이란,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이후 6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서 미국 현대무용을 주도적으로 지배하게 되는 형식주의적 춤의 경향과, 그 반대로 인간의 내면적 혹은 주관적 감정표출을 앞세우면서 때론 춤과 연극적 표현법이 결합되어, 문명비판적이거나 시원적(始原的)인 시·공간의 창출을 꾀하게 되는 표현(주의)적 경향의 춤들을 일컫는다. 여기서 전자의 흐름에는 커닝햄은 물론 트리샤 브라운(Trisha Brown)이나 로라 딘(Laura Dean), 혹은 트와일라 타프(Twyla Tharp)와 같은 이른바 포스트모던 계열의 안무가들이나 그로부터 영향받고 있는 이들, 또 넓게는 조지 발란신 같은 발레 마스터들이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시키고 퍼뜨린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발레의 경향이 포함되고, 후자의 흐름에는, 80년대 들어 급부상한 피나 바우쉬를 비롯한 일부 독일 현대무용 안무가들이 발전시킨 탄츠테아터(Tanztheatre) 경향의 춤들과 일본의 부토(Butoh) 등을 꼽아볼 수 있다. 특히 후자의 경향은 그들의 춤이 1910~1920년대에 독일을 중심으로 발달한 표현주의적 경향―순수 움직임의 기능적 표출보다는 과장, 변형, 왜곡을 통해 인간 감정의 근원을 드러내면서 문명비판성을 강조하는―과 이상스럽게 공명, 즉 일종의 ‘부활된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와 같은 극단적인 서구 극장춤의 미학적 대립―은근하거나 때론 노골적인― 사이에서, 다른 감성과 방법론에 의해 춤을 발전시키고 있는 모습들은 잘 드러나 보이질 않고 있거나 조명을 못 받고 있다. 대신 대립감만 더 심화되어, 피나 바우쉬의 1984년 뉴욕 데뷔 공연 후, 뉴욕의 괴테하우스에서 가졌던 한 토론회에서, 독일 탄츠테아터 운동을 적극 지지했던 춤비평가 요헨 슈미트(Jochen Schmidt)가 “미국 형식주의적 경향의 춤에서는 아무런 중요성이나 의미도 없는, 단지 움직임밖에 볼 수 없다”고 하자, 대립된 위치에 있던 『뉴욕타임즈』의 비평가 안나 키셀고프(Anna Kieselgoff)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상징”이라고 반박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세계 예술춤 운동과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 비평가들이나 학자들은 루돌프 라반(Rudolf Laban)과 마리 뷔그만(Mary Wigman)으로부터 출발했던 현대무용의 기원과 음으로 양으로 관계를 맺고 발달되어 온 현대무용에 대해서는 일견 의도적으로 매우 인색하게 언급하고 있거나 무시하여 왔다. 그런 중에 그 같은 양극의 대치감 속에서 세계춤계의 주목을 끌며 80년대 들어 적극적인 국가의 정책적 뒷받침을 업고 부상했던 프랑스의 새로운 현대무용이나 영국 및 네덜란드나 벨기에의 현대무용은 그들의 의욕적인 성취만큼 세계 예술춤사에서 아직은 확고한 위치가 부여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그 위상이 많아 높아졌다.)
요즘 들어 부쩍 항공운송의 발전과 컴퓨터를 이용한 통신의 발전 때문에, 온 세계가 점점 하나의 국가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은 들지만, 사실 어느 나라의 문화든 전통의 잔존과 현대주의, 그리고 후기현대주의 문화의 공존을 거의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서 전통과 현대성이 뒤섞여 화해하기 힘든 내적 갈등을 겪고 있으면 곧잘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고, 현대주의가 정착해서 대중적인 확산과 그에 따른 경제의 안정과 함께 첨단적인 과학의 영역에서 큰 진보가 이뤄지고 있으면 선진국으로 분류되곤 한다. 일부에선 아직도 개발도상국으로, 또 일부에선 경제력 11위의 선진국으로 분류되고 있는 한국의 경우는 그 세 가지 가치관의 공존이란 측면에서는 매우 전형적이며, 여기서 굳이 어떤 결합의 형태를 밝혀달라고 한다면, 전통주의(50%)+현대주의(30%)+후기현대주의(20%)이거나, 전통주의(40%)+현대주의(40%)+후기현대주의(20%)로 답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런 비율에서 보듯이 전통주의와 현대주의의 대치/결합이 여전히 한국사회와 문화의 기둥과 저변을 형성하고 있는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문화적 결합의 구조 속에서 한국은 앞서 독일이나 일본의 일부 현대무용처럼, 춤과 연극 간의 자유로운 결합을 꾀하면서 나름대로 정밀한 극장공연 형태를 실험적으로 추구하기 어려우며, 또 반대로 미국의 앞서가는 후기현대적 경향의 춤이나 형식주의적 춤처럼 단지 움직임 자체를 통해서만 미감(美感)을 느끼고 그곳에서 창의성을 발견하는 편중된 미학적 태도를 취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양극단성이나 편중성을 벗어난, 여태까지 세계춤의 논의에서 진지하게 거론되지 않았던 영역―‘제3의 영역’이라고 불러보고 싶다―의 춤에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된다. 다행히 이 영역에서 한국의 현대 춤문화와 예술은 풍부한 관심과 주목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Ⅱ.
고래로부터 전래된 여러 유형의 한국 고유의 민속무나 궁중무 그리고 아직도 답습과 수용의 단계에 있는 발레를 제외하고, 지난 60년 이상 한국의 예술춤은 세 가지 유형의 춤스타일을 발전시켜 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소위 ‘신무용(新舞踊)’이라고 해서 큰 마당이나 장터, 혹은 근엄한 분위기의 궁정에서 행해지던 여러 형태의 전통무들이 나름대로 어레인지되어 극장무대화되거나 속화(俗化)되어서 만들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창작춤’으로 불리는 것으로서 신무용과 흡사한 듯 보이나 전혀 다른 미학적 특성을 갖춘 춤으로, 70년대 중반 이후에 형성되어서 지금까지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춤이다. 이런 춤은 과감하게 서구적 현대무용에서 보는 듯한 구성방법과 동작들을 활용, 대개 20분 이상의 길이를 가지면서 제의적이면서도 문명비판적이고, 동시에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원형상(原型像)을 과감하게 드러내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앞서 1930년대의 신무용 탄생의 시기와 맞물리면서, 이사도라 던컨류의 자유무용이나 이후 마리 뷔그만의 표현주의 춤에서 영향받다가, 60년대 초부터 보다 체계적인 훈련방법(미국의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에 의해 특히 70년대와 80년대 들어 한국예술춤의 급격한 확장과 상승을 가져온 이른바 ‘현대무용’(후기현대적 경향의 춤 포함)이다. 여기서 특히 오늘날 한국예술춤을 리드하고 있는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라 할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거기에 내재된 미학적 방향들은 앞서 말한 극단의 형식주의적/표현주의적 경향을 ‘모두 빗겨가고’ 있으며, 지난 80년대 중반 이후 약 10년간은 매우 뚜렷한 각 장르 나름대로의 주목할 만한 미학적 성격 구축을 꾀하고 있다.
우선 한국창작춤은 자칫 한국전통춤과 현대무용의 억지스런 결합이란 오명을 씻기 위해, 한국전통춤 동작의 주의 깊은 선택과 배열, 일부 즉흥성의 삽입과 함께 춤질〔舞質〕의 입체감을 높이기 위해 다소의 변형을 꾀하고 있으며, 일부는 전형적인 프로시니엄적 사각틀을 벗어나 보다 열린 공간성을 지향하거나(강미리의 경우), 또 퍼포먼스성이 삽입되는 방대한 규모의 스펙터클한 춤을 만들며(배정혜·한상근의 경우), 또 다른 일부는 문학적인 무용극(국수호의 경우)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엄정하고 독립적인 춤체계에 의해 내면적이고 제의적인, 현대적 엑스터시의 춤을 추구하기도 한다(김영희의 경우). 그러나 그 어떤 것이 되었든, 한국창작춤은 단순한 동작의 나열이나 그 동작의 특수한 미적 형태나 패턴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자연스런 춤질 위에 극적 감정을 결합시킨 응집력 있는 군무(群舞)의 도움을 받아, 춤예술을 여러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는 ‘문화적 상징의 한 덩어리’로 제시하려는 경향을 짙게 띤다. 따라서 이 춤은 춤동작과 포즈, 표정 간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형식적 결합을 이루려는 차원에서만 만족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주 그것은 ‘공동체성’을 내세우면서, 개인보다는 집단성, 그리고 민중적 서민성을 더 내세운다.
이 경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한 안무가인 강미리의 경우, 그녀는 『활(闊)』(1989), 『류(柳)-생명의 나무』(1996)와 같은 작품을 통해 서민의 애달픈 민중적 감성을 그 근저에서 끌어올리며 한국춤 동작의 역동적 구사를 통해 도리스 험프리의 『물의 연구』와 맞먹을 만한 서정적 움직임의 시적 구성을 해내었으며(『활(闊)』), 또 다르게는 컬러풀하며 압축된 강한 상징적 공간성을 설정, 자연과 깊게 교감하는 한국인의 고대 신화적 인간상의 모습―천(天)·지(地)·인(人)의 합일을 이루는―을 현대적이며 시원적인 감각으로 그러내었다(『류(柳)』).
또한 강미리의 바로 윗세대로 1994년 무트댄스(The Mut Dance)라는 이색적인 이름의 춤그룹을 결성한 김영희 경우는 부토적 움직임을 연상시킬 정도로 느린 움직임과 함께 강한 내적 충동을 이끌어내는 표현주의적 감성의 춤동작을 결합시키면서, 일종의 모자이크적 구성력을 빌려 아방가르드적 분위기의 전율적인 춤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녀의 『아무도 Ⅱ』(1996), 『아리랑』(2000), 『달아』(2005)와 같은 작품이 특히 그렇다.
또 그런가 하면 제의적이며 문화적 감성의 총체적 무용극을 추구하고 있는 다산(多産)의 남성 창작안무가 국수호는 『티벳의 하늘』(1998), 『사도-사도세자 이야기』(2007)를 통해 하늘에 가 닿고자 한 동양적 정신세계와(『티벳의 하늘』), 역사의 비극감을 강한 표현적 움직임과 현대의 퍼포먼스성을 결합시켜(특히 『사도세자 이야기』) 스펙터클하면서도 집약적으로 그려냈다.
이미 35년이 지속되고 있는 이 경향의 춤은 현재는 더 젊은 안무자들이 출현, 보다 자유스런 공간이동과 함께 한국춤 동작에 즉흥성을 삽입, 서구적 컨템포러리춤과의 경계를 점점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근작 최지연 안무의 『천축(天竺)』(2007)은 그 대표적 경우이며, 이 춤흐름의 4세대에 속한다 할 수 있는 20대 후반의 정보경을 비롯한 젊은 여성 안무자들(김설리, 서연수, 김수정, 김윤경)은 전 세대의 창작무용가들과 다른 정확한 움직임의 리듬감, 예상치 못한 특이한 동작성, 특별한 춤의 미감을 춤에 더하며 한국창작춤의 세계를 더 컨템포러리화시키면서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런 한편, 한국의 현대무용은 서구적 춤테크닉의 일방적인 수용과 한국적 스타일의 시도라는 두 가지 미학적 방향을 똑같이 존중해오다가, 특히 80년대 중반 이후에 들어서는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의 현대무용가들 사이에서는 후자에 대한 관심이 전자에 대한 관심보다 더 우위를 점하게 된다. 따라서 일부 전문저널과 춤비평가들은 국수주의적 시각에서보다는, 자문화(自文化)의 발전과 옹호의 차원에서 그 같은 8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 현대무용의 경향을 곧잘 ‘현대무용의 한국화’라 불렀다.
이런 경향은 춤 주제나 소재의 발견에서뿐만 아니라, 춤동작의 질적인 측면에서 모두 문화주체적인 시각의 변화가 따라 준 것으로서, 이것은 한국의 전통제의나 전통민속무인 살풀이에서 어떤 대립하는 힘을 상생(相生)으로 푸는 엑스터시적 주제를 발견하거나(홍신자·이정희의 경우), 윤회사상에 기반을 둔 불교적 주제성과 소재(이야기)의 발견(김복희·김화숙의 경우)을 꾀하며, 한국사회 속에 감춰진 폭력과 그 구원의 주제를 드러내는 것(최정자·박명숙의 경우)에서부터 관행적인 현대무용의 테크닉에 의도적으로 느린 움직임이나 흥겨운 즉흥성을 삽입해서 팔·다리의 움직임에 완만한 곡선미를 배합하거나 유희성을 증진시키는 것(김기인·정귀인·안애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할 수 있다.
곧 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 뉴욕을 중심으로 래핑스톤무용단(Laughing Stone Dance Company)을 결성, 보이스(voice)를 곁들인 미니멀적 명상성을 띤 춤세계를 개척한 홍신자의 아방가르드적 퍼포먼스였던 『제례』(1973)나 느린 움직임의 『나선형의 대각선』(1984), 정치사회적 주제성을 드러내며 80년대 다양하게 변주되었던 이정희의 ‘살푸리 시리즈’, 불교적 소재의 무용극들이었던 김복희·김화숙의 『흙으로 빚은 사리들의 나들이』(1988)나 김복희 안무의 『꿈, 탐욕이 있는 그림』(1995), 민중적 정서를 짙게 띤 최청자의 『불림소리』(1989), 그리고 정귀인의 『동동(動動)』(1984)이나 안애순의 『열한 번째의 그림자』(1998)나 『One-after the Other』(2003)와 같은 작품들이 그 대표적 예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중 특히 안애순의 작업에 와서 한국 춤문화에 내재한 유희성·이완성·정중동의 미감들이 한결 춤의 동작적 측면에서, 그리고 춤구성의 측면에서 선명하게 가시화되었다. 『만석중놀이』란 한국 민속인형극의 움직임을 작품에 도입한 그녀의 『열한 번째 그림자』나 현대문명의 불안정한 소요(騷擾)와 내면을 지향하는 존재성과의 갈등을 그린 『One-after the Other』가 특히 그렇다.
따라서 이런 춤예술적 현상은 서구의 현대무용이 초기에 가졌던 일종의 국제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인 가치가 시간이 가면서 사실은 ‘위장된 보편성’일지 모른다는 판단과 함께, 세계가 글로벌리즘(globalism)을 표방하면 할수록 각 문화권, 각 민족이 가진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가 더 부각되면서, 여기서 각 지역문화권이 어떻게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보다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가운데 새로운 세계문화의 형성에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한국 춤예술가들의 고민을 반영해주고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이런 춤예술적 태도는 또한 움직임의 미묘한 뉘앙스나 질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춤작품이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가질 수 있는 주제나 소재, 때로는 이야기성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온 일부 형식주의적 춤미학과 ‘의도된 거리감’을 두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한국창작춤과 한국의 현대무용을 공통적으로 묶고 있는 미학적 고리는 ‘두 개’라 할 수 있다. 하나는 현대의 예술무용은 아직도 한국문화 깊숙이 잔존한 전통으로부터 배우고 활용할 것이 많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어떤 실험적이거나 극단적인 편중된 미학을 지향하기 보다는, 각 개인이나 집단의 춤창조적 행위의 기반이 되고, 환경이 되는 지역문화의 특수한 측면을 어떻게 춤언어와 그 표현의 차원에서 보편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창작춤은 전통성과 현대성이 결합된 독특한 춤의 장르로서, 동양권의 극단화된 극장춤 양식인 일본의 부토보다도 그 언어의 다양화 측면에서 훨씬 돋보이며, 동시에 서구식 현대무용의 관행적 동작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훌륭한 자극이 되고 있다. 달리 말해, 한국의 현대무용은 안무적 동작과 능란한 기교의 전시를 앞세우는 서구 일부 국가들의 현대무용보다도 어쩌면 더 인간적인 정서를 깊고 훈훈하게 전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사실상, 20세기 현대무용의 발전뿐만 아니라, 극장춤 미학의 형성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던 미국의 춤비평가 존 마틴(John Martin)은 그의 비평관의 독자적인 구축에 있어서, 스스로 자인했듯 스스로 하나의 소홀함을 범했고, 동시에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미학적 지침을 주기도 했다. 그 하나의 소홀함(보다 정확하게는 ‘유보’)이란 지구상에 잔존한 여러 유형의 전통무용(이것을 영미권에서 거의 모두 ‘ethnic dance’라 부른다)이 가질 수 있는, 즉 현대무용과 접목될 수 있는 창조적 활용가능성을 예견치 못한 것이며, 반면 경청해볼 만한 하나의 지침이란, 춤은 움직임을 기반으로 하되 결코 움직임 자체나 그것의 정서적 차원(이것을 그는 ‘메타키네시스’라는 유명한 말로 표현했다)이 ‘결핍된’ 퍼즐식 결합은 아니다란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창작춤이나 현대무용은 공히 전자에 대한 건전한 관심을 꾀하고 있으며, 또 춤의 움직임과 어떤 정서적 결합형태를 아직도 중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춤공연이란 허공에 맹목적으로 그려지는 손짓이 아니라, 다소 보기에 부담스럽더라도 내부에서부터 나오는 어떤 감정이나 주목할 만한 의도의 표출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테크니컬한 한국의 후기현대적 혹은 컨템포러리적 경향의 작품은 그런 감정이나 의도를 희석시키고, 대신 형식주의적 기량의 전시와 반복, 의미 없는 유희성에 더 탐닉하고 있기도 하다.
의심할 바 없이 오늘의 춤예술은, 그 앞선 흐름에서는 극단적인 미학적 실험주의를 높이 사면서 옹호해주는 경향을 취한다. 여기서 개인의 창조성과 기술력, 소수 집단적 앙상블의 구축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오늘의 춤예술은 또한 춤을 통한 문화보존의 기능과 문화상호 간의 이해증진을 함께 갖는다. 이것은 올해, 서울의 가을 시즌 공연만 해도 수많은 유형의 춤들이 대·소극장 가릴 것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함께 펼쳐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한 극장에서는 연극인지 춤인지 모를 공연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 극장에서는 춤과 영상과의 이색적인 멀티미디어적 결합 시도가 있다. 또 한 극장에서 서구의 고전발레가 공연되는가 하면, 또 다른 한두 곳의 소극장에서는 한국의 전통무가 소수이지만 열혈 관객의 지지 속에 소리 없이 오르고 있다. 그런 가운데 매우 흥미롭게도 80년대 후반부터 부토 계열의 춤꾼으로서 한국창작춤에 소리 없이 영향을 미친 야마다 세츠코는 일본보다 한국의 서울에서 더 많은 지지자를 갖고 있는 반면, 한국의 무용가들 중 현대무용가 홍신자와 한국창작춤의 대모 김매자는 나름대로 뉴욕과 동경, 그리고 북경에서 그들을 인정해주는 일단의 지지층이나 관객을 갖고 있다. 곧, 그런 만큼 오늘의 춤예술적 현상은 동시다발적이면서 상호교류적이고, 그러면서 현대의 극장예술로서 춤은 각 작품마다, 혹은 각 무용단마다 공연을 통해 독특하게 전달하는 여러 문화적(미학적) 가치성을 지닌다. 따라서 단일한 가치가 아닌 ‘다가치적(多價値的) 공존체’가 오늘의 춤예술이라 할 수 있고, 여기서 우리는 어떤 절대적인 하나의 미적 기준에 의해서만 춤예술의 모든 가치를 재단(裁斷)하는 편협성은 사려 깊고, 과감하게 거부해야만 할 것이다.
* 번역 참조
현대춤=contemporary dance
현대무용=modern dance(일반적이고 포괄적인 뜻. 때로는 더 앞서 가는, 요즈음의 contemporary dance를 지칭할 때가 있다.)
신무용=Shinmuyoung(the Neue dance)
한국창작춤=Changjak Choom(Contemporary Korean Dance)
현대의=contemporary
표현주의적=expressive
시원적=primitive(archaic)
퍼포먼스=performance (art), performativity
시간적으로 modern->postmodern->contemporary(동시대란 뜻이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가장 앞선 경향을 지칭할 때가 많음)
공연과 리뷰=PAF
김태원=Kim, Tae Won